1990년대
우리 기업이 경제사에 남긴 영광의 발자취와
역경을 딛고 성장한 스토리를 연대기별로 담았습니다.
특징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출처: 삼성전자)
해외 진출 전성기
1990년대 초중반 소련 등 공산주의권 붕괴, 중국의 시장 개혁·개방으로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됐습니다. 우루과이(UR) 협상 타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은 국경 없는 무한 경쟁 시대를 열었습니다. 90년대 들어 고입금, 고금리, 고물류비 등 3고 체제가 고착화되자 우리 기업들은 시장경쟁력 강화를 위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겼습니다. 또한 세계화에 발맞춰 ‘글로벌 경영’을 내세우며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외환위기와 구조조정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우리나라는 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습니다. 대우를 비롯한 30대 재벌의 3분의 1이 좌초하고, 전국의 수 많은 기업이 연쇄도산 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구조 개선, 경영 투명성 강화 등 체질 개선에 주력했습니다. 한편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기업과 내수기업 간 격차가 확대되는 양극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자본∙기술집약산업 고도화
국민소득의 증대로 내수시장이 팽창하면서 주요 대기업이 내수시장 지배력을 기반으로 자본과 기술의 축적을 이뤘습니다. 그 결과 수출제품의 구조가 자동차, 반도체 등 자본과 기술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산업 제품 위주로 전환되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발전은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통신사업에 경쟁이 도입되면서 다수의 기업이 유선통신 및 이동통신사업, 국제전화사업 등에 뛰어들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초고속 무선인터넷, 위성 데이터 통신 등 기간통신사업자 수가 확대되었습니다.
연도
- 1991. 1.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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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최초 독자 기술로 ‘알파엔진’ 개발
현대자동차가 국내 최초 독자 개발한 알파엔진 (출처: 현대자동차)
- 1991 대우국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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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절감을 위한 국민차 보급계획 제안 및 국민차 사업 진출
1991년 대우국민차 창원공장 준공식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1992. 9.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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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M D램 (출처: 국립중앙과학관)
- 1992.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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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판덱스 첫 독자개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의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
(출처: 효성티앤씨)
- 1993. 6.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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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회장, 신경영 선언
1993년 6월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출처: 삼성전자)
- 1993.11.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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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대형마트 이마트 1호점 개점
1993년 이마트 창동점(서울 도봉구) 당시 전경
(출처: 이마트)
- 1994. 1. 선경(현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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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동통신 인수
선경의 한국이동통신 지분 매입 이후 열린 첫 임시주주총회(1994.7.7)
(출처: SK텔레콤)
- 1994.10.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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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애니콜 브랜드 모델 SH-770 출시
삼성 애니콜 최초 모델 SH-770 지면광고
- 1995. 2. 다음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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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의 전신) 설립
1997년 한메일넷 초기화면
- 1995. 3. 케이블TV 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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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대우 등 대기업 케이블TV 개국과 함께 방송산업 진출
1995년 3월 1일 케이블 TV방송 시작
(출처: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 1996. 4. 넥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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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서비스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출처: 넥슨)
- 1996. 6.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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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최초 인터넷 쇼핑 서비스 개시
1996년 인터파크 홈페이지
- 1998. 9.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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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 시행
미국 앨라배마공장 전경 (출처: 현대자동차)
- 1999. 8. 대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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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크아웃으로 그룹해체
서울역 앞 대우센터 (현 서울스퀘어)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현대자동차가 국내 최초 독자 개발한 알파엔진 (출처: 현대자동차)
1991. 1. 현대자동차 한국 최초 독자 기술로 ‘알파엔진’ 개발
현대는 80년대 들어 다양한 고유모델 자동차를 개발하고, 캐나다와 미국 등 해외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자동차 개발의 핵심인 엔진은 일본 미쓰비시에 막대한 설계도 로열티를 지불하고 제조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1983년 국산 엔진 개발을 지시했다. 그해 9월, 엔진개발실이 꾸려지며 엔진 개발이 시작됐다.
엔진 기초설계는 영국의 엔지니어링 전문 업체인 리카르도가 맡았으며 최종완성까지 무려 288번의 변경을 거쳐야 했다. 총 1천억 원을 투입해 7년 4개월 동안 대규모의 연구개발 투자가 이뤄졌다. 1991년, 마침내 현대차는 대한민국 최초로 독자개발 엔진 ‘알파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최종개발 된 알파엔진은 1.5L 가솔린 엔진으로 자연흡기 모델은 102마력의 최고 출력과 14.5kg.m의 최대토크를, 터보 모델은 129마력의 최고출력과 18.3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스쿠프 터보는 최고 시속 역시 205km를 기록하며 국산차 최초로 시속 200km 돌파하며 당시 놀라운 기술 수준을 보여주었다.
현대차는 위험관리 차원에서 물량이 적은 현대 스쿠프에 알파엔진을 처음으로 적용했다. 스쿠프는 대한민국 최초의 스포츠카이자 스페셜티 카로 홍보되는 차였다. 알파 엔진을 얹은 스쿠프는 ‘스쿠프 알파’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이후 알파 엔진은 엑센트 등 소형자동차와 아반떼 등 준중형차 모델에 적용됐으며, 2011년 9월 단종된 2세대 프라이드까지 쓰이다가 카파엔진과 감마엔진에 바통을 넘겼다.
알파엔진 개발로 미쓰비시에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관계를 청산하면서 현대차는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고, 이는 자동차 대중화를 촉진하게 했다. 또한 알파엔진의 개발은 국내 자동차산업의 기술 자립을 이끌었으며 현대차는 일본과 미국 등에 엔진을 수출하며 자동차산업의 선두주자로 도약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64M D램 (출처: 국립중앙과학관)
1992. 9. 삼성전자 세계 최초 64M D램 개발
삼성전자는 1992년 9월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반도체 개발에 성공한다. 64메가 D램은 손톱 크기만 한 칩 위에 1억 4천 400만 개의 소자가 집적된 집적회로로, 신문지 512쪽, 한글 400만 자를 저장할 수 있다. 0.35마이크론의 초미세 가공 기술이 적용된 최첨단 제품으로, 당시 선진 반도체 메이커들조차 개발해내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반도체 시장은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였던 삼성전자는 당시 선진국과 기술격차가 심했으며, 1983년까지 시장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며 적자를 면치 못했다. 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는 1992년 64메가 D램을 개발하면서 11년 만에 일본 도시바를 제치고 D램 시장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이어 94년 256메가 D램, 96년 ‘꿈의 반도체’로 불리는 1기가 D램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이로써 반도체 시장 주도권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왔다.
삼성전자의 64메가 D램 개발은 우리나라의 수출 산업구조를 ‘노동집약적’, ‘자본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바꾸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전자산업 경쟁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한국이 ICT 강국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64메가 D램은 2020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국립중앙과학관이 인증하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됐다.
1991년 대우국민차 창원공장 준공식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의 스판덱스 브랜드 ‘크레오라’ (출처: 효성티앤씨)
1992. 효성 스판덱스 첫 독자개발
1980년대 말,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은 스판덱스를 효성의 미래먹거리 사업으로 결정했다. 스판덱스는 ‘섬유의 반도체’라 불리는 고부가가치 기능성 섬유로, 강도와 신축성이 좋아 속옷, 스타킹, 수영복, 청바지, 아웃도어 등 다양한 의류제품에 두루 사용된다. 당시 스판덱스 시장은 미국 듀폰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연평균 20% 성장을 이루어 전망이 밝았다. 그러나 외국 기업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기술을 이전 받기에는 비용이 막대했다. 조 회장은 독자 기술 개발을 지시했다.
스판덱스의 성공을 확신하지 못한 효성은 ‘Q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89년부터 독자개발에 착수했다. 3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효성은 1992년 스판덱스 독자개발에 성공했다. 국내 최초, 세계에서 네 번째 개발이었다. 효성은 스판덱스 브랜드 이름을 ‘크레오라’로 짓고 상업 생산에 돌입했다. 초창기에는 품질이 경쟁사에 비해 낮아 연간 생산량 140t, 국내 시장점유율 3위에 그쳤다. 그러나 효성은 지속적으로 품질을 개선해 나갔으며, 98년 IMF 외환 위기 때 비주력 계열사를 매각해 얻은 돈을 과감히 투자해 스판덱스 기술력을 높여갔다.
90년대 말부터 섬유산업이 어려워지고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국내외 경쟁사들이 잇따라 도산하거나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원천기술을 보유한 효성은 고객의 요구에 맞춘 다양한 제품과 고부가가치 소재 위주의 차별화 전략, 중국 등 글로벌 생산기지를 통해 생산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며 위기에 맞섰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글로벌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며, 2010년 이후 지금까지 스판덱스 시장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또한 효성의 스판덱스 사업 성공은 사양산업으로 치부되던 섬유산업에 부흥기를 가져왔다.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출처: 삼성전자)
1993. 6. 삼성 이건희 회장, 신경영 선언
1990년대 초반 삼성은 국내 최정상 기업의 반열에 올랐지만, 이건희 회장은 글로벌 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1993년 6월 4일, 삼성의 정보통신부문 디자인 고문인 ‘후쿠다’는 이건희에게 신경영의 도화선이 된 일명 후쿠다 보고서를 건넸다. 삼성 경영진의 디자인에 대한 얕은 이해와 2류에 안주하는 내부행태를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출장을 가던 길에 이건희는 삼성 사내방송에서 제작한 품질고발 비디오테이프를 전달받았다.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의 규격이 맞지 않자, 근로자가 덮개를 칼로 깎아 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큰 충격을 받은 이건희는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삼성전자 임원과 해외주재원 등 200명을 불러 모아 놓고 ‘신경영 선언’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이건희는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이후 삼성의 경영 현장에서 신경영 선언의 구체적인 노력이 나타났다. 먼저는 불량률을 줄이고 품질을 높이기 위해 ‘라인 스톱제’를 시작했다. 1995년 3월 구미공장에서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전량 소각한 ‘애니콜 화형식’도 신경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삼성은 세계 일류 기업으로 발전했으며 90년대 국내 기업들에 품질 혁신의 기조를 불어넣었다.
1993년 이마트 창동점(서울 도봉구) 당시 전경 (출처: 이마트)
1993.11. 신세계 국내 최초 대형마트 이마트 1호점 개점
1990년대 한국에는 대형마트가 등장하고 개방화 물결이 이는 등 유통산업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1993년 11월 12일 개점한 국내 최초의 대형마트 이마트 창동점이 그 시작이었다. 90년대 초까지 공산품은 백화점과 대리점, 채소나 고기 등 신선식품은 전통시장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며 ‘할인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마트 창동점은 대량 매입을 통해 납품가격을 낮추고 매장 인테리어를 간소화함으로써 ‘상시 저가(everyday low price)’ 정책을 내세웠다. 공산품과 신선식품을 백화점 및 전통시장보다 싸게 살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며 오픈 첫날 약 2만6천8백여 명의 손님이 몰려들었고 첫날만 1억8백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마트가 ‘가격파괴’ 신드롬을 일으키자 수익 악화를 우려한 백화점과 제조업체들은 이마트 창동점에 납품을 중단하는 등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이마트에 입점한 경쟁업체의 매출이 급속도로 증가하자 제조업체들은 가격결정권을 이마트에 넘기고 다시 납품에 들어갔다. 이후 이마트는 일산점(1994), 안산점(1995), 부평점(1995)을 잇따라 열며 점포 수를 빠르게 늘려갔다. 이마트를 만든 신세계그룹은 1997년 삼성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되며 유통기업으로서 면모를 갖춰 나갔다.
선경의 한국이동통신 지분 매입 이후 열린 첫 임시주주총회(1994.7.7) (출처: SK텔레콤)
1994. 1. 선경(현 SK) 한국이동통신 인수
정보통신산업은 통신망 구축에 막대한 자본이 요구되는 기간산업으로서 80년대까지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이동통신이 대중화되자 정부는 통신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쟁체제 도입을 발표한다.
선경의 대한텔레콤은 84년부터 미주 경영기획실을 운영하며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1992년 1,2차 사업권자 선정 심사에서 선경은 경쟁업체에 큰 점수 차로 앞서며 최종 선정됐다. 그러나 당시 현직 대통령이었던 노태우와 최종현 회장의 사돈관계로 인해 특혜시비가 일었다.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선 후보였던 김영삼은 4개월 남은 차기 대선에 악재가 될 것을 우려해 강하게 반발했다. 반대 여론이 거세자 선경은 일주일 뒤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고, 체신부는 사업자 선정을 차기 정권으로 넘겼다.
1993년 12월, 새로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2차 제2 이동통신 신규사업자 선정과 동시에 제1 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를 추진한다. 선경은 다시 한번 신규사업자 선정에 도전했다. 체신부는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확정,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이 결정하도록 했다. 문제는 당시 전경련 회장이 최종현 회장이라는 것이었다. 또 다시 특혜시비가 일 것을 우려한 선경은 제2 이동통신 신규사업자 도전을 스스로 포기하고 대신 막대한 인수자금이 필요한 제1 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 참여했다.
1994년 1월 선경은 공개입찰에서 시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5,000원에 한국이동통신 주식 22.23%를 확보하며 마침내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했다. 총인수자금은 4,271억2000만 원에 달했다. 제2 이동통신 신규사업자로는 포항제철과 코오롱 컨소시엄의 신세기이동통신이 선정됐다. 마침내 이동전화사업이 경쟁체제로 돌입하면서 이후 우리나라 이동통신 서비스는 양적·질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나갔다.
삼성 애니콜 최초 모델 SH-770 지면광고
1994.10. 삼성전자 최초의 애니콜 브랜드 모델 SH-770 출시
1984년 한국에 휴대폰이 처음 등장한 이후 10여 년간 미국의 모토로라는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70%에 육박하는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삼성전자는 국내 최초의 자체 개발 휴대폰 SH-100을 선보였으며, 이후 꾸준히 새로운 모델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차가웠다. 통화 품질과 무게 등이 경쟁업체에 크게 밀렸다.
절치부심한 삼성은 93년 11월, 100g대의 초경량 휴대폰 SH-700을 출시한다. 시장 점유율 15%를 기록하며 소폭의 성과를 냈으나 여전히 브랜드 인지도가 약했다. 이에 삼성은 다음 해인 94년 8월, ‘언제 어디서나 전화가 잘 터진다’라는 의미를 담아 애니콜 브랜드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그해 10월, 애니콜 브랜드 최초 모델 SH-770을 출시했다. 산이 많은 한국 지형에 강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을 어필하며 적극적 마케팅을 펼친 결과, 출시 직후 수개월 만에 국내 시장 점유율 26%대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곧 문제가 드러났다. 애니콜의 불량률이 11.8%에 달한 것이다. 10대 중 1대가 불량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시장에 판매된 불량 휴대폰을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라고 지시했다. 1995년 3월에는 회수한 불량 휴대폰 15만 대를 전량 소각하는 ‘애니콜 화형식’을 치렀다. 이후 불량률은 2%까지 내려갔으며 마침내 1996년, 47%의 점유율로 모토로라를 제치고 국내 시장 1위에 올라섰다.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애니콜 성공 신화의 시작이었다.
1997년 한메일넷 초기화면
1995. 2.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의 전신) 설립
연세대 전산학과 재학시절 이재웅은 1989년 인터넷의 전신인 비트넷을 접하고 인터넷의 가능성을 예견했다. 이후 동 대학원을 마친 후 93년 프랑스 ENS(Ecole Normale Superieure)에서 인지과학 박사과정 중에 파리 유학 중이던 촉망받는 사진작가이자 고교 동창 박건희를 만난다. ‘인터넷과 예술의 융합’을 꿈꾸게 된 두 사람은 유학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1995년 2월, 이재웅의 대학 후배인 이택경까지 세 사람이 의기투합해 ‘다음커뮤니케이션’을 공동 창업했다. 회사명 다음커뮤니케이션에는 인터넷을 통해 ‘다음(NEXT)’, 즉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미와 다양한 소리(多音)를 조화시킨다는 의미를 담았다.
초창기 다음은 고부가가치 사업인 홈페이지·인트라넷 등 개발용역을 통해 수익을 얻고 이를 바탕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 운영했다. 다음의 첫 인터넷 서비스는 사진, 회화 등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교류하는 ‘버츄얼갤러리(Virtual Gallery)’였다. 패션 전문 서비스 ‘패션넷’, 영화 정보 서비스 ‘싸이네마(Cynema)’, 여행 전문 서비스 ‘투어월드’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서비스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콘텐츠 중심의 인터넷 서비스로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다음은 기술 기반 인터넷 서비스로 방향을 전환하고 1997년 5월,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hanmail.net)을 세상에 내놓았다. 포털 사이트를 위한 포석이었다. 한메일은 서비스 개시 1년 10개월 만에 회원 수 150만 명, 2년 만에 160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 한메일은 브랜드 이미지 전환을 위해 서비스 명칭을 ‘다음’으로 바꾸고 1999년, ‘다음 카페’라는 새로운 형태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선보였다. 한메일과 다음카페의 잇따른 성공은 다음이 포털 사이트로 도약하는 기반이 되었다. 90년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시대의 개막, IMF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부의 벤처육성 정책 추진, 한메일과 다음카페의 잇따른 성공 등은 IT 벤처 창업 붐을 이끌었다.
1995년 3월 1일 케이블 TV방송 시작 (출처: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1995. 3. 삼성, 대우 등 대기업 케이블TV 개국과 함께 방송산업 진출
1995년 3월 1일 오전 10시, 48개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System Operator)가 9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24개 채널의 본방송을 개시했다. 케이블 방송의 역사적인 개국이었다. 케이블 방송이 수익 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사업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많은 기업이 케이블TV 사업에 앞다투어 진출했다.
삼성(캐치원), 대우(DCN) 등 대기업들은 PP(채널사용사업자, Program Provider)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영화 등 자체 콘텐츠 제작에 많은 투자를 했다. 이들 기업은 이를 계기로 영화산업에도 진출해 이후 한국 영화계에 체계적인 배급·마케팅·회계시스템을 정착시켰다. 중앙일보(Q채널), 조선일보(비즈니스앤), 매일경제신문(MBN) 등 신문사도 PP사업자로서 케이블TV 사업에 속속 진출했다. 홈쇼핑TV(HSTV)와 하이쇼핑 등 홈쇼핑 PP사업자들이 등장해 TV홈쇼핑 시대를 열었으며 중소 제조업체들은 새로운 판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케이블TV 산업은 출범 초기부터 준비 부족과 정책 혼선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IMF 외환위기까지 닥쳐오면서 수많은 PP 사업자가 부도를 냈고, 시장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고전하던 삼성, 대우 등 대기업이 연달아 시장에서 철수했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99년 <종합유선방송법>이 개정되고 <통합방송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케이블TV PP업계의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규제 완화로 사업자 간 겸영이 허용되면서 CJ헬로비전, 태광티브로드, 현대HCN 등 대기업이 인수·합병을 통해 여러 SO를 복합 소유하게 되었다. 특히 투니버스 채널로 시작한 동양그룹(현 오리온그룹)은 이 시기를 기회로 삼아 DCN, 바둑TV, 캐치원을 차례로 인수·합병하며 온미디어라는 통합브랜드를 만들고 확장해갔다. 99년 말 티어링 제도(다수 채널을 몇 개의 꾸러미로 묶어 서로 다른 가격으로 시청자에게 제공)가 도입되면서 PP 간 경쟁으로 프로그램 경쟁력이 강화되었다. 99년을 기점으로 케이블TV 산업은 위기를 딛고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출처: 넥슨)
1996. 4. 넥슨 세계 최초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서비스
1994년 12월 김정주는 서울대와 카이스트 동기인 송재경(현 엑스엘게임즈 대표)과 손잡고 게임회사 ‘넥슨’을 공동창업했다. 송재경은 넥슨의 첫 작품으로 김정주에게 자신이 즐겨보던 만화 ‘바람의 나라’를 게임화하자고 제안했다.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 초기를 배경으로 삼아 대무신왕 무휼의 일대기를 그린 판타지물이다. 두 사람은 김진 작가를 찾아가 원작 계약을 하고 그래픽 온라인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당시는 인터넷 서비스나 이메일이 상용화되기 전이었으며 온라인 게임이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바람의 나라는 95년 12월 25일 베타테스트를 거쳐 96년 4월 5일 PC통신 천리안에서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출시 당시에는 MMORPG(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가 아닌 그래픽 머드(MUD)로 시작했다. 당시 천리안과 하이텔 등 PC통신에서는 텍스트로만 게임을 진행하는 머드 게임이 유행했는데, ‘바람의 나라’는 여기에 그래픽을 더해 한국 게임시장에 그래픽 온라인 게임의 장을 열었다. 그러나 서비스 초기인 1996년에는 게임을 통해 매출을 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전화선을 연결하여 접속하는 PC통신 시절이었기 때문에 유저들은 매달 전화 요금 고지서를 걱정하며 게임을 해야 했다. 게임 매출을 고민하던 넥슨은 96년 전 세계 게임업계 최초로 부분 유료화를 선보였다. 게임은 무료로 즐기되 일부 아이템 등은 현금으로 구매하는 것이다. 부분 유료화는 이후 대다수 온라인 게임업체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됐다.
98년부터는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게임 환경이 바뀌면서 건물과 지형 등 배경 그래픽, 아이템이나 승급제 등 게임 시스템, 인터페이스 등이 대대적으로 변경됐다. 유저가 급속히 늘면서 98년 연 매출 100억 원을 기록했다. 99년 말 ADSL이 상용화되고 전국적으로 PC방이 유행하자 바람의 나라는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나라는 국산 온라인 게임 최초로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에 수출되었으며, 대한민국 게임 산업의 발판을 다지고 한국의 게임시장을 온라인 게임 위주로 재편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1996년 인터파크 홈페이지
1996. 6. 인터파크 국내 최초 인터넷 쇼핑 서비스 개시
1996년 6월, ‘인터파크’가 서비스를 개시했다. 인터파크는 ‘인터넷 테마파크’의 줄임말로, 데이콤의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소사장제를 통해 사업 아이템으로 선정되며 탄생했다. 인터파크는 국내 최초로 순수 온라인쇼핑몰을 오픈해 전자상거래 시장을 열었으며, 지금까지 국내 대표 이커머스 사이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인터파크는 입점형 쇼핑몰(mall&mall) 전략을 구사했다. 상품 판매를 원하는 생산 업체와 유통업체가 가상 매장에 입점해 상품을 등록하여 판매하는 초기 오픈마켓의 모습을 보였다. 소비자들은 인터파크의 등장으로 24시간 운영되는 온라인 매장을 통해 상품을 구매하고 배송 받는 새로운 쇼핑 경험을 갖게 됐다. 또한 인터파크는 ‘다양한 상품을 오프라인보다 싸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저가 정책을 펼쳤으며, 다양한 세일 및 이벤트를 진행해 온라인 구매자들에게 혜택을 제공했다. 인터파크는 급성장을 거듭해 1997년 데이콤의 자회사 ‘데이콤 인터파크’ 라는 이름으로 분사했고, 1999년 데이콤에서 완전히 독립해 인터파크로 사명을 변경하고 코스닥에 상장했다.
인터파크와 롯데인터넷백화점이 같은 날 온라인쇼핑몰을 오픈한 이후 이듬해인 97년 신세계 백화점 쇼핑몰, e현대, 한솔CS클럽 등 온라인 쇼핑몰이 속속 등장했다. 98년 삼성몰, 옥션이 뒤를 이었고, 온라인서점인 예스24, 알라딘이 첫 선을 보였다.
미국 앨라배마공장 전경 (출처: 현대자동차)
1998. 9. 현대자동차 미국에서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 시행
현대차는 1986년 ‘포니엑셀’을 앞세워 미국 시장에 입성했다. 사업 첫해 17만 대의 판매 성과를 올렸으나 현대차는 ‘싸구려 차’라는 혹평을 받았다. 낮은 품질과 정비망 부족이 이유였다. 1998년에는 판매량이 역대 최저인 9만여 대를 기록했다. 이에 1998년 9월 정몽구 회장은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이라는 초강수를 두기로 결정한다. 당시 포드와 GM은 3년 3만6,000마일, 도요타·혼다·닛산이 5년 6만 마일을 보장하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수리비용이 과하게 늘어날 것을 우려해 거세게 반대했다. 시장에서는 단기적 시장점유율을 늘리려는 마케팅 무리수로 치부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를 밀어붙였다. 어떻게든 품질을 끌어올리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한 이는 미국의 자동차 구매·정비 문화를 분석한 후에 내놓은 치밀한 전략이었다. 미국은 자동차 판매점(딜러)이 자동차 정비 공장을 함께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차를 구매한 고객은 무상 보증 기간 동안 해당 딜러가 운영하는 정비업소에 차를 맡기기 마련이다. 현대차는 무상 보증기간을 늘리면 딜러와 고객 간 유대 관계가 깊어져 현대차의 재구매율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대차는 1999년부터 대대적인 마케팅을 통해 ‘최장·최고의 무상수리 보증’이라는 인식을 심는 한편, 2000년 품질총괄본부를 신설하고 품질 향상에 집중했다. 모듈화도 그 일환이었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을 몇 개의 큰 덩어리(모듈)로 나눠 미리 조립한 뒤 완성차 공장에 납품하는 모듈화를 통해 품질은 높이고 원가는 낮출 수 있었다. ‘10년 10만 마일 무상 보증제’를 도입한 이후인 1999년 현대차의 미국 내 판매량은 16만 대, 2003년 40만대로 늘어났다. 미국 소비자조사업체인 ‘JD파워’ 신차품질조사(일반브랜드 부문)에서 1998년 꼴찌였던 현대차는 2006년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하며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서울역 앞 대우센터 (현 서울스퀘어)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