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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현대)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정주영

1915년 11월 25일 - 2001년 3월 21일
정주영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초대회장으로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입니다. 빈곤과 굶주림의 대한민국을 선진 산업국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낮은 기술력과 자본을 극복하고 건설, 조선, 자동차 및 운송 부분에 걸쳐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현대화에 큰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부호였음에도 평생 청렴하고 검소한 삶을 살아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기업인 중의 하나이며 2006년 미국 타임스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포함되기도 하였습니다.

생애

1915 ~1945

  • 1915.11
    •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출생
  • 1930.3
    •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 1934
    • 쌀가게 복흥상회 취업
  • 1938.1
    • 쌀가게 경일상회 개업
  • 1939.1
    • 변중석 여사와 혼인
  • 1940.3
    • 1940년 3월 자동차 수리공장, 아도 서비스 인수

1946 ~1955

  • 1946.4
    • 현대자동차공업사 설립
  • 1947.5
    • 현대토건사 설립
  • 1950.1
    •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 합병, 현대건설 주식회사 설립
  • 1953.4
    •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착공

1956 ~1965

  • 1958.5
    • 한강대교 복구공사 준공
  • 1964
    • 단양시멘트공장 준공식
  • 1965
    •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 수주 (국내 최초 해외 건설공사)

1966 ~1975

  • 1967.12
    • 현대자동차 설립
  • 1968.2
    • 경부고속도로 착공
  • 1970.1
    • 현대시멘트 설립
  • 1970.10
    • 고리원자력 1호기 착공
  • 1973.12
    • 현대조선중공업 설립

1976 ~1985

  • 1976.1
    • 현대자동차 포니 출시
  • 1976.2
    •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
  • 1977.2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 10년간 5선 연임(1977~1987)
  • 1977.7
    • 아산사회복지재단 설립
  • 1981.5
    •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 취임
  • 1984.2
    • 서산 간척지 물막이 공사 (정주영 공법이라 불리는 유조선 공법 시도)

1986 ~2001

  • 1989.6
    •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 개원
  • 1992.3
    • 제 14대 국회의원 당선
  • 1992.12
    • 제 14대 대통령 선거 출마
  • 1998
    • 소 1001마리와 함께 두 차레 방북
  • 2001.3
    • 별세

주요사건과 업적

  • 쌀집 종업원에서 가게 사장으로

    정주영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1915년 11월 25일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던 정주영은 돈을 벌기 위해 수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19세가 되던 봄날 정주영은 마지막 가출을 단행하고 경성으로 상경한다. 공사장 막노동, 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다가 쌀가게 복흥상회에서 배달원 일을 시작했다. 정주영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자전거와 배달기술을 연마해 최고의 배달꾼이 되었고 취직한지 6개월 만에 장부정리까지 맡는다. 복흥상회 주인은 노름에 빠져 있던 아들 대신 자신의 가게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고 정주영은 이를 물려받아 1938년 1월 ‘경일상회’를 설립한다. 쌀장사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1940년 군수품 비축을 위한 일제의 쌀 자유판매 금지로 경일상회는 폐업해야 했다.

  • 기술보국의 시작. 현대자동차공업사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정주영은 예전 쌀가게 단골손님의 권유로 서울 아현동의 ‘아도서비스(Art Service)’라는 정비공장을 인수해 자동차정비업을 시작한다. 사업은 성공적이었으나 1943년, 일본의 ‘기업 정리령’으로 강제합병을 당한다. 광복 후 정주영은 귀속재산불하 조치로 대지 2백평을 불하 받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로 정비업을 재개한다. 현대를 지향하며 발전된 미래를 들어보자는 정주영의 소망을 담은 ‘현대(現代)’의 시작이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차량수리와 개조로 명성을 떨치며 전국의 우수한 기술자들이 모여들며 설립 1년 만에 80명의 직원을 둔 회사로 성장하였다.

  • 현대건설 설립. 잔디 대신 보리로 고정관념을 깨다

    정주영은 1947년 5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여 건설업에 진출한다.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을 설립하고 건설업을 키워보려 하였으나 6.25 전쟁이 일어난다. 정주영은 미군의 전시긴급 공사를 사업기회로 살리려 노력하였고 기회가 찾아왔다. 1952년 겨울,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에 맞춰 현대건설은 미군으로부터 ‘유엔군 묘지를 푸른 잔디로 덮어줄 것’을 주문 받는다. 정주영은 겨울에 자라기 어려운 잔디 대신 ‘푸른 보리’를 사용해 묘지를 녹색으로 만들어 성공적으로 공사를 완료하는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한다. 이 일은 크게 화제가 되고 미군의 발주가 급격히 늘아난다.

  • 신용을 지키기 위해.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 완공

    1953년. 한국전쟁 후 맡았던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는 건설장비의 부족, 물가폭등, 교각이 급류에 휩쓸리는 사고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특히 전쟁 후의 막대한 인플레이션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1953년 40환이던 쌀 1가마니 가격이 1955년 4000환으로 100배 가량 오를 정도였다. 공사장 인부들의 월급을 주지 못하자 파업이 일어났고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주변에서 공사중단을 권유하였으나 정주영은 ‘신용의 중요성’을 외치며 동생과 매제의 집까지 팔고 막대한 사채를 끌어다 공사에 쏟아부어 1955년 끝내 완공시켰다. 이는 정부로부터 현대건설의 신용을 높게 평가받는 계기가 됐고 1957년 전후 최대 공사였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 수주의 큰 배경이 된다.

  • 시련의 경험을 기회로. 경부고속도로 완공

    정주영은 국내건설 경험을 토대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당시 정부 발주공사에 의존하는 국내 건설시장에서 성장은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1965년 태국 정부가 발주한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을 수주한다. 대한민국 건설사 최초의 해외진출이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얻으며 공사를 무사히 완공하였으나 부족한 기술과 경험, 장비 탓에 꽤 큰 손해를 봐야 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이라는 이름을 해외시장에 알렸으며, 태국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은 국내 고속도로 건설을 본격화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계기가 됐다. 1968년 2월, 428km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시작됐다. 국내 16개 건설사 중 현대건설이 30%에 해당하는 구간을 맡아 주도적으로 공사에 참여해 높은 수준의 기술을 빠르게 전파함으로써 타 건설회사의 시공능력까지 끌어올렸다.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3.76%에 불과한 낮은 이익률을 남겼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만큼은 기업의 이해득실을 초월해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건설에 임하겠다는 정주영의 뜻이 반영된 결과이다.

  • 500원 지폐 속 거북선으로 조선소 건설 차관을 얻다

    정주영은 조선업은 위험부담은 크지만 후방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크며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며 사업에 진출한다. 그러나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금을 얻기 위해서는 외자확보가 필요했다. 정주영은 영국 바클레이 은행과 차관도입을 협의했으나 거절을 당한다. 1971년 바클레이와의 재협상을 위해 선박 컨설턴트 회사 ‘애플도어’의 롱바텀 회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정주영은 지갑속에서 거북선이 그려진 당시의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한국은 영국보다 300년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다.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다”며 설득한다. 이에 감동받은 롱바텀 회장의 도움으로 바클레이로부터 차관을 이끌어낸다. 그리고는 아직 조선소도 짓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의 선박왕 조지 라바노스를 찾아가 특유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유조선 2척의 수주계약을 따낸다. 정주영은 1972년 조선소를 건설하는 동시에 육지에서 선박을 함께 만드는 세계 최초의 작업을 시작했으며, 2년 후인 1974년 2월에 조선소 준공식과 선박을 선주에게 넘기는 명명식이 같은 날 동시에 치르는 신화를 이뤄냈다.

  • 자동차는 혈관속의 피와 같다. 포니 자동차 출시

    1974년 현대자동차는 연간 5만6천대 생산규모의 자동차공장을 짓기 시작한다. 당시 국내 승용차 수가 총 10만대 였음을 고려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정주영은 “자동차를 완벽하게 생산하는 나라는 항공기든 뭐든 완벽한 생산이 가능한 나라” 라며 국내 독자개발을 추진했다. 마침내 1976년 90%의 국산화율을 달성하며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한 이름인 포니(pony)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로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로 자동차 독자 생산가능 국가가 됐다. 포니는 생산된 첫해만 1만대를 판매하며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고 1970년대말부터 연간 10만대로 생산을 늘리게 된다. “인체 내의 혈관이 고속도로라면, 자동차는 혈관 속의 피와 같다”고 말한 정주영의 말 속에 자동차 산업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 사막 위에 당당히 쓴 역사. “주베일 산업항 공사수주”

    1976년 2월, 현대건설은 ‘20세기 최대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수주에 성공했다. 공사금액이 9억4천만 달러 규모로 당시 우리나라 일년 국가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액수였다. 공사입찰 전 바닷속 암반에 기초공사를 하는 기술적 어려움과 불투명한 수익성으로 인하여 내부의 반대의견이 거셌다. 그러나 정회장은 주베일 공사의 해양구조물 시공 완수는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정주영은 입찰 후 보국정신에 기반해 외화를 알뜰하게 사용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가능한 모든 기자재를 국내에서 생산해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운송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큰 공사자재를 실은 배가 총 19번에 걸쳐 울산과 사우디 바닷길을 오갔으며 창의적 발상과 집념, 실행력으로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 1977.아산의 이름으로, 아산재단 설립

    1977년 정주영은 자신의 현대건설 주식 절반을 출연해 아산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500억원에 달하는 규모로 당시 우리나라 연간 사회복지예산인 195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본인의 신념을 실현한 것이다. 아산(고향의 이름을 본따 만든 정주영의 아호)의 소천 이후 설립자의 뜻을 이어 받아 아산재단은 오늘날 의료사업, 사회복지지원사업, 장학사업, 학술연구지원사업 등을 선도적으로 펼치고 있다.

  • 서산 간척사업, 한국 지도를 새롭게 그리다.

    정주영은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간척사업을 통해 단 한 뼘이라도 땅을 넓혀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척사업은 기업이 하기에는 수익성이 낮은 사업이었음에도 정주영은 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번 만들어진 땅은 영원한 생산의 원천이 된다며 서산 간척사업에 도전했다. 1982년 4월부터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한 간척사업은 방조제를 쌓아 바닷물을 가두고 그 물을 빼서 육지로 만드는 이른바 ‘물막이 공사’를 하다 특유의 지형과 거센 물살로 난항을 겪게 된다. 당시 공법대로라면 20톤 이상의 돌이나 돌맹이가 필요해 천문학적인 비용발생이 예상됐다. 정주영은 이를 대신해 울산조선소에 있는 폐선을 방조제로 활용하여 조수를 막아놓고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이나 버럭으로 물을 막는 전대미문의 공법을 아이디어로 냈으며, 6개월의 검토 끝에 공사비 절감과 충분한 안전성이 확보된 것으로 결론이 난다. 1984년 2월 25일, 수 많은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유조선을 이용해 끝막이를 하는 일명 ‘정주영 공법’ 은 대성공을 거두며 약 4,700만 평의 바다가 대규모 농지로 변화하며 대한민국 지도가 새롭게 그려졌다.

  • “경제는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 재계의 대표 전경련 회장 추대

    정주영 회장은 1977년 부터 1987년까지 제13대~17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아 10년동안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정회장은 “재계에서 생각하는 민간주도경제란 민간업계에서 해야 할 일은 민간에 안심하고 맡기라는 뜻이다. 정부에서 어떤 선(원칙)만 그어주면 민간은 창의력을 발휘해 스스로 최선의 방법을 찾게 돼있다(1981년)”며,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정회장은 국내 최초의 민간경제연구소인 한국경제연구원을 설립(1981)하는 한편, 기업의 장기자금 조달 지원을 위한 대형 민간은행인 한미은행을 창립했다. 또한 ‘경제법령민간협의회’를 발족(1985년)시켜 산업계 현실을 반영한 법적 기반 조성에도 노력하였다.

  •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88서울올림픽 유치”

    1981년 4월 정주영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88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돼 자금조달능력, 기반시설, 국제스포츠계 인맥 등 대한민국보다 월등히 앞선 일본 나고야 유치단과 경쟁해야 했다. 정주영은 한국 유치단을 이끌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리는 서독의 바덴바덴으로 건너갔다. IOC 위원들과 별다른 친분이 없었던 그는 전경련의 각국 경제협력위원장들과 현지 진출 기업인, 특파원 등을 총동원해 IOC위원들을 만나고 설득했다. 매일 밤 대표단 회의를 열어 표를 점검하고 IOC 위원들의 개인적 연고를 찾아내 유치전략을 세우며 고군분투하였다. 정주영은 84명의 IOC위원들의 숙소에 일일이 정성을 들인 꽃바구니를 보냈는데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급시계를 선물한 일본보다 공개적인 감사인사를 받아내는데 주효하였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내 IOC 위원들과의 만남을 수월하게 하였다. 1981년 9월 30일, IOC 총회에서 울린“쎄울!”이라는 외침과 함께 한국 유치단은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결과는 52 대 27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정주영은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일절 관련 수익사업 및 시설공사를 하지 않음으로써 유치를 위해 사력을 다했던 본인의 진심을 전했다.

경영철학

정주영

건전한 기업가 정신

“경영인은 건전한 기업가정신을 가져야 한다.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 즉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에 도움을 주고 국가발전 성취에 이바지하는 것인가를 올바로 생각한다면, 설혹 하는 일에 있어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지라도 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1985.1.11. 사장단 세미나에서

아산 정주영은 ‘기업이란 자유경쟁체제에서 경쟁하며 생명을 갖고 성장한다’ 말하면서 국제 경쟁 사회에서 자생할 힘에 대해 강조함과 동시에 국가에 이바지하는 기업가의 정신을 강조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목적이 단순히 돈을 벌어 풍족하게 살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진정한 정신은 열심히 일을 해 이윤을 남기고, 가정을 안정시키며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인간답고 슬기로운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음을 일평생을 걸쳐 몸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