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그룹의 전신이 되는 삼수사의 창업주입니다. 국내 최초의 기업형 농장 경영으로 우리 농촌의 근대화를 주도하였으며, 만주로 진출하여 산업보국의 꿈을 실천하였습니다. 한국전쟁 후에는 소금, 설탕 등 가장 기본적인 식재료부터 폴리에스터 섬유소재까지 다양한 사업 분야로 확장하며 국민의 의식주 문제 해결에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도경영으로 민족자존, 민족경제 자립에 헌신한 한국 근대 기업의 선구자입니다.
김연수는 1896년 10월 1일, 동학난의 본거지인 전북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지산 김경중은 인재양성을 위해 일제의 압박에도 사재를 털어 중앙학원을 설립하고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현 고려대)의 인수기금도 마련하는 등 남다른 민족의식과 선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찍이 유학길에 올랐던 형 김성수의 영향을 받아 1911년 일본으로 유학길에 오른 김연수는 1916년 도쿄 아자부중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교토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학사 타이틀을 가지게 된다. 형 김성수는 조국에 유능한 인재를 키워낼 교육기관과 민중을 깨우치기 위한 언론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형의 꿈은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가 없음을 알고 조국부강을 위하여 기업인이 되기를 꿈꿨다.
유학 후 귀국한 김연수는 산업시찰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겨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한 한인들의 상황을 보며, 반드시 조국으로 돌아가 민족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후 김연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형 김성수의 권유로 경성직뉴(京城織紐)와 경성방직(京城紡織)의 운영을 맡게 되고, 1923년, '별표고무신'을 출시해 고무신 시장에 진입한다. 이 제품은 '6개월 보증 판매'라는 파격적인 전략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었고,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였다. 1926년에는 경성직뉴 주식회사를 중앙상공주식회사(고무신 제조회사)로 변경하고 이사로 취임하였다. ‘거북선표고무신'을 출시하며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여 판매량을 크게 늘렸으며, 이는 경성방직의 기초가 된다.
김연수는 1923년에 전남 장성군 남면에서 농촌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다. 만주에서 품었던 '낙토(樂土)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하여 이 땅의 근대 기업을 개척하는 초석을 놓아 한국의 산업자본 형성을 선도했다. 장성농장을 시작으로 1931년까지 7년간 호남 일대에 모두 7개의 농장을 조성하며 농업 경영을 조직화한다. 농장들은 소작료를 낮추고 소작권을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등 혁신적인 영농 조건을 통해 농가의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1931년에 삼수사(三水社)를 삼양사(三養社)로 변경하고, 사훈으로 ‘삼양훈(三養訓)’을 제정하여 삼양그룹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36년에는 간척사업을 통해 농토를 확장하고, 만주에 봉천사무소를 설립하여 국내 자본의 최초의 해외 진출을 펼치며 우리민족의 경제자립과 농촌 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1936년, 김연수는 젋은 시절부터 꿈꿔오던 대륙 진출을 위해 만주 봉천사무소를 개설하며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1937년 천일농장을 시작으로 6개의 농장을 차례로 개설하였고, 1939년에는 만주 소가둔에 17만평 부지를 확보하고 대규모 방적공장인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김연수는 한국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법인으로 기록된 남만방적에 직원들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공장학교를 세워 운영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체 부설학교가 탄생한 것이다.
1939년, 김연수는 식민지 시대에 ‘인재를 키우는 것만이 희망’이라는 믿음으로 개인 재산 34만원(현 시가 약 136억원)을 출연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육영단체인 양영회(현재의 양영재단)를 설립한다. 양영회는 장학사업과 연구 지원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민족의 미래에 희사하였다. 한국전쟁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던 양영회는 1962년 부활하며, 기본자산을 6억원으로 늘리고 장학금 지원 대상을 자연과학에서 인문학 분야까지 확대하였다. 1968년에는 양영회와 별도로 김연수와 그의 세 아들 김상홍, 김상하, 김상응이 소유 주식 8만주를 재단 기금으로 출연해 수당장학회(현재의 수당재단)를 설립하였다. 수당재단은 1973년부터 ‘수당과학상’으로 수여했던 상을 2006년부터는 ‘수당상’으로 이름을 바꿔 수상하며,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학문의 발전에 초석을 다지고 있다. 양영재단과 수당재단은 김연수의 인재 육성 정신을 계승하여 장학사업과 학문 발전을 위한 지원을 통해 한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김연수는 1945년 해방 이후 민족 분단을 겪으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만주에서의 사업 기반을 모두 잃었고, 농지개혁이 단행되면서 국내 농장들도 정부에 넘겨야 했다. 혼란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다. 당시 미군정이 염전 운영을 민간에 개방함에 따라, 김연수는 우리나라 소금난을 해결하기 위해 산업보국의 뜻을 품고 소금 제조 허가를 받아 1946년 해리염전을 설립했다. 해리염전은 전쟁 포화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내 최대의 민영 염전으로 성장했다.
6.25 전쟁으로 그 동안 이루어 놓은 모든 사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지만 김연수는 특유의 침착함을 발휘해 재기에 나섰다. 전쟁의 참화로 굶주리고 있던 국민에겐 생활필수품 공급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제당업과 한천제조업 두 가지로 사업 가닥을 잡은 그는 울산 바닷가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개펄과 바다를 메워 7만 5,000평의 공장부지를 마련하였고,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며 하루 50톤의 정제당을 생산할 수 있는 제당공장을 준공하고, 1956년 1월 마침내 ‘삼양설탕‘을 출시할 수 있었다. 1962년에는 일본 오키나와에 설탕을 수출하며, 한국 기업 최초로 일본에 설탕을 수출하였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사업은 점점 성장가도를 달렸다. 김연수는 1963년 자금난을 겪던 전주방적을 인수하여 삼양모방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경영에 나섰고, 섬유산업에서 견방업으로 전환 및 정상화를 꾀하면서 화섬 분야로의 신규 진출을 추진했다. 설탕, 수산물 등 먹거리에 집중하던 사업 포트폴리오를 한 단계 넓힌 것이다. 김연수는 정부가 발표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맞춰 전주에 폴리에스터 공장을 준공하였다. 1968년 기업공개 후 5년 만에 매출이 33억원에서 206억원으로 6배 넘게 늘어났고, 자본금과 자산도 각각 5배와 2배씩 급성장했다. 전주 폴리에스터 공장은 하루 13톤의 폴리에스터 칩을 생산하는 국내 최초의 중합시설로, ‘트리론’이라는 브랜드로 제품을 출시하여 삼양 폴리에스터의 주력 제품으로 자리 잡았다.
김연수는 암울하던 식민지 시대에도 기업의 윤리경영을 강조하고 부의 사회환원을 앞장서서 실천했다. 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1월 금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그의 경영관이자 인생관인 개척정신, 사회봉사정신, 인간존중정신은 지금까지도 계승되어 발전되고 있으며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삼양사를 산업자본으로 일궈낸 선구적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의 삼양사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대기업으로서 어제보다 오늘에,
오늘보다 미래에 더욱 보람찬 꿈을 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온갖 성의와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계를 이룩해 나가는 앞길에는 지나온 역사가 증언하듯이 예상할 수 없는 더 많은 난관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전진을 주저해서는 안되겠다"
- 서울경제신문 재계회고(1974~1975) -
수당 김연수는 ‘산업보국’의 신념으로 민족 최초의 해외 현지 공장을 설립하는 등 개척자의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인간존중의 원칙’을 소중히 여기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인간을 존중하고 기업의 성장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安分以養福),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기를 기르며(寬胃以養氣), 낭비를 삼가하여 재산을 기른다(省費以養財)”는 삼양훈을 정신적 가치로 삼아 중용정신(中庸精神)으로 창조적 혁신 경영과 풍요한 사회 건설, 행복한 생활을 지향하는 기업 문화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