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근당의 창업주입니다. 정직과 신용의 경영 철학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제약산업을 통해 생명 경외의 큰 뜻을 펼쳐 한국 제약산업의 현대화를 이끌었습니다. 의약품 원료를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기에 국내 최대 규모의 원료합성 및 발효공장을 설립해 의약품 원료의 국산화를 이뤘고, 대한민국 최초로 미국 FDA 승인을 받아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을 수출해 제약산업의 국제화를 선도했습니다. 이후 항결핵제 리팜피신의 국산화를 통해 당시 국민들에게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결핵 퇴치에 이바지하는 등 약업보국을 실천한 개척자이자 선구자로서 한국경제의 발전에 공헌한 기업인입니다.
종근당 창업주이자 한국제약계의 선구자인 고촌 이종근은 1919년 11월 1일 충청남도 당진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일합방의 망국적인 슬픔과 가난을 몸소 체험하며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로 상경해 철공소 견습, 정미소 배달 등을 하면서 땀의 대가를 배웠다. 난관을 통해 오히려 자신을 단련시키고 시련을 극복하는 법을 체득해 나갔다. 이종근은 후일 “밤새 영업을 하다 쌀이 떨어진 요릿집이나 술집에서 새벽 2시나 3시에 주문을 하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배달을 갔다. 추운 겨울날 선잠에서 깨어 자전거를 타는 일은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페달을 힘차게 밟아야만 했다”고 회고했다.1939년 봄 동춘당약방(東春堂藥房)을 거점 삼아 자전거를 타고 경성과 경기도는 물론 멀게는 황해도와 전라도까지 지방 곳곳을 다니며 약품 외판 일을 시작하면서 곁눈으로 제약 제조 공정도 꾸준히 배워나갔다. 약업의 길에 들어선 이종근은 장차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은 내 손으로 지키고 싶다는 꿈을 키워갔다. 약관 23세가 되던 1941년 5월 7일 아현동 282-3번지에 네 평 규모의 가게를 얻어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종근당의 모태인 ‘궁본약방(宮本藥房)’을 설립, 우리나라 첨단 기술산업의 효시인 제약산업을 일으키며 약업인으로서의 큰 뜻을 펴기 시작했다.
궁본약방은 1943년 조선총독부의 기업정비령(企業整備令)에 의해 강제로 폐업해야 했다. 이종근은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의약품을 필요로 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절실했기 때문에 약품 외판을 계속했다. 암중모색의 긴 시간을 보내던 끝에 1946년 4월 1일 서대문구 아현동 85-149에 대지 12평 규모의 1층 가게를 얻고 종근당약국(鍾根堂藥局)을 개업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상호를 지은 것은, 자신의 이름과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약업에 헌신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종근당약국을 뿌리로 종근당제약사를 거쳐 오늘의 주식회사 종근당으로 이어졌다. 원료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해외에서는 ‘CKD’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한국전쟁 당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부산 피난시절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는 가공장을 짓고 ‘염산에페드린정’, ‘산토닌정’ 등의 약품을 생산, 공급해 전란의 시국에 큰 힘이 되었다.
이종근은 1948년 해방 후 혼란기에 사기를 당해 가짜 약품을 유통하다 서대문경찰서에 피소된다. 이후 고의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 풀려나기는 했으나 이 사건은 이종근이 직접 약품 제조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1949년, 이종근은 종근당약방 2층에 대광화학연구소라는 종근당의 첫 연구소를 설립하고 같은해 10월 바셀린에 항생제 다이아진 분말을 혼합해 튜브에 넣은 국내 최초의 튜브 제품 ‘다이아졸 연고’를 생산했다. 1950년 2월에는 제2호 제품인 살충제 ‘강신 빈대약’을 출시했다. ‘강하고 새로운’ 이라는 뜻을 ‘강신(强新)’이라는 제품명에 담은 이 약은 경쟁업체의 ‘원자탄 빈대약’을 압도할 만큼 강한 살충력을 바탕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1월, 이종근은 대광화학연구소를 폐지하고 종근당제약사를 설립하여 제약허가를 취득했으며, 1956년 ‘주식회사 종근당제약사’로 법인등록을 완료했다. 1957년에는 국내에서 부족했던 항생제 공급을 해결하기 위해 덴마크의 제약회사인 LEO사와 기술 제휴를 맺어 국내 최초로 항생제의 상업적 생산을 시작했다. 이 기술 제휴는 한국 제약 산업의 현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종근당이 국내 선도 제약사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1961년 외환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제약원료를 수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종근은 97일간 이탈리아, 스위스, 영국, 독일, 홍콩, 덴마크 등 전 세계 16개국의 제약사를 방문하는 해외 시찰을 통해 국내 의약품 제조 기술의 현대화와 원료 의약품의 국산화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체 생산을 결심한다. 1965년 국내 최초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항생제 원료 합성공장을 준공하여 100%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 원료의 국산화를 이뤄냈다. 1968년 국내 최초로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것은 이종근의 제약인생에서 가장 독보적인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 FDA의 승인을 얻은 제약회사는 미국 외에 100개 회사 정도였고 FDA 승인을 얻으려면 미국의 상위 제약회사에 견줄만한 기술수준을 갖춰야한다는 선행조건이 있었다. FDA에 대한 도전조차 무모한 것으로 여기던 시절, FDA 도전과 성공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준 개가였으며 제약산업 전반에 '하면 된다'는 고무적인 분위기를 심어주었다. FDA 승인을 계기로 종근당은 1969년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일본에 ‘클로람페니콜’을 62만불 규모로 수출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 의약품 총 수출액은 110만불로 종근당은 의약품 수출액의 56%를 차지하는 경이적인 기록도 함께 남겼다. 특히 1970년 미국 제약업계 랭킹 4위였던 워너렘버트사에 항생제를 수출했다는 사실은 한국 제약업계를 고무시킨 또 하나의 쾌거였다.
이종근은 신약개발이야말로 국내 제약산업을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인 제약사로 도약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1972년 업계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그가 마련한 신약개발의 토대는 1995년 종합연구소, 2011년 효종연구소로 개편됐으며, 2003년 항암제 신약 ‘캄토벨’과 2013년 당뇨 신약 ‘듀비에’가 탄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974년 완공된 한국 최대 규모의 의약품 원료 발효공장은 이종근의 오랜 꿈이자 제약업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당시 발효공장의 생산능력은 11개의 발효조가 모두 가동될 경우 항생제 원료 1백 70톤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로 국제적인 수준이었다. 종근당은 원료 발효부터 합성, 완제품에 이르기까지 의약품을 일괄 생산하는 최초의 제약사가 되었다. 1970년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너무 비싼 약값 때문에 국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환경에서, 1980년 자체 기술로 세계에서 4번째로 항결핵제를 개발하여 결핵 퇴치에 기여한 것은 그가 질병 없는 사회를 꿈꾼 참제약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제성장을 맞은 대한민국은 외국자본의 국내 유치를 위해 1966년 외자도입법을 제정했다. 이종근은 선진 제약회사들의 앞선 경영기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신기술 제휴선 보강’, ‘자체 기술 개발력 강화’, ‘일반의약품 강화’라는 세 가지 전략으로 다국적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다만 합작 지분을 50대 50으로 한다는 원칙만은 고수했다. 회사의 운명을 다른 나라 기업에 맡길 수 없다는 이종근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1980년 한국롱프랑제약 주식회사, 1983년 한국로슈, 1986년 주식회사 한국그락소 등을 설립하여 국제적인 면모를 갖춘 것이 그 예이다.
이종근은 성공한 기업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특히 엄격하여 절제와 검소함을 생활 신조로 삼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썼다. 그는 ‘우리 사회의 인재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잇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는 신념으로 1950년대 부산 피난 공장시절부터 진학을 원하는 종업원들의 야간학습을 지원하는 등 일찍부터 장학사업을 통한 사회 환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60년대에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중견사원들이 대학원에 진학하도록 권장하며, 배우려는 열의는 있으나 학비로 힘들어하는 젊은 인재들에게 배움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3년에는 본인의 사재를 출연해 종근당장학재단(현 종근당고촌재단)을 설립하여 전 종업원의 자녀에게 중학교 이상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재단은 현재 장학금 및 학술연구비 지원은 물론 최초의 무상지원 기숙사인 ‘고촌학사’를 설립하여 대학생들의 주거문제 해결에도 앞장서며 다양한 장학사업 및 학술연구 사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1987년에는 남다른 인재 사랑으로 종근당고촌학원을 설립하고 대동세무고등학교를 통해 육영사업에도 전념했다. 이종근은 1993년 서거 시 모든 재산을 육영사업에 기증했으며, 그의 육영의지를 받들어 사재 338억원이 종근당고촌재단 및 종근당고촌학원에 기증됐다. ‘기업에서 얻은 많은 이익을 사회와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고촌의 고귀한 뜻은 고촌재단과 고촌학원을 통해 더 많은 인재육성과 사회공헌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종근은 수출 증진을 통해 한국의 경제 성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동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지속적이고 혁신적인 경영 활동으로 1975년에는 더 높은 등급인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9년에는 경영 성과와 리더십을 인정받아 한국의 경영자상을, 1986년에는 장학사업에 대한 헌신으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평소 한국제약협회나 유관기관에서 보건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추천받으면 항상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후배 제약인들에게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수상을 양보했던 이종근이었기에 목련장 수훈은 더욱 뜻깊은 일이었다. 이종근은 단순한 기업가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며 한국 사회와 경제 발전에 기여한 국가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귀감이 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혁신적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종근은 1993년 2월 7일 영면 이후에도 후세대가 존경하는 기업인으로서 더욱 큰 빛을 발하고 있다. 2005년 종근당고촌재단과 UN 산하 결핵퇴치 국제협력사업단(Stop TB Partnership)은 대한민국 제약사상 최초로 국제적인 '고촌상(Kochon Prize)'을 제정했다. 고촌상은 자체 기술로 항결핵 의약품을 생산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 시장에 보급하는 등 결핵 퇴치 사업을 위해 평생을 이바지한 이종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상은 매년 결핵 퇴치 분야에서 현저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되며, 수상자에게는 10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2010년 인간생명의 존귀함을 지키며 약업보국을 실천한 선구자로서 한국 제약산업의 현대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조폐공사가 주관하는 ‘한국의 인물’에 선정되는 등 그 뜻과 업적은 현재에도 남아 길이 빛나고 있다.
우리가 약을 만드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만드는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항상 우리의 약이 있어야 한다
고촌 이종근은 불모지에서 제약업을 일으켜 우리나라 첨단 기술산업의 효시가 된 제약산업의 현대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우리 국민의 건강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싶다’는 신념으로 ‘약업보국(藥業輔國)’을 경영철학으로 삼아 평생을 제약산업에 헌신했다. 평소 ‘송곳은 끝부터 들어간다’는 원칙으로 일의 시작과 기초를 중시한 그는 종근당 창업을 통해 질병 없는 사회를 만들고 국가경제와 인류의 건강에 기여했으며, ‘인재 양성이 국가와 기업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확신으로 육영사업을 통해 사회 발전에 공헌한 경영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