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의 설립자이자 명예회장입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가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포항제철(포스코) 사장에 취임하여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일념으로 종합 제철 일관공정을 완공시켰습니다. 경영 일선에 물러나기 전까지 포스코를 연간 2,100만t의 생산능력을 갖춘 세계 3위의 철강사로 올려놓은 ‘한국의 철강왕’으로 1987년 철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베서머 금상을, 1992년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하였습니다.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서 수학하던 박태준은 해방 후, 곧바로 귀국하여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했다. 생도 시절 당시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소위 임관 후,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었으며 탁월한 지휘 능력으로 육군 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청년 시절을 바쳤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설치되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장에 의해 발탁, 비서실장에 임명되고 이어서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4년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만성 적자에 시달리던 국영기업 대한중석(현, 대구텍)을 맡아 사장으로 임명된 지 1년 만에 흑자전환을 한다. 기업 내의 잘못된 관행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원들에게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며, 특유의 리더십으로 빠르게 임직원을 하나로 모아 이룬 쾌거였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그는 평소 삶의 좌우명으로 여기던 이 말을 붙들고 과거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듯이, 기업이라는 터 위에서 사명을 이루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하나로 ‘종합제철소’ 건설을 내세웠던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박태준에게 ‘종합제철건설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고,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탄생하면서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창립요원 34명 중 용광로를 직접 본 사람은 박태준 사장 뿐이었을 정도로 기술과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당초 차관 제공 및 기술지원을 약속했던 국제컨소시엄 KISA가 세계은행(IBRD)이 내놓은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의 비관적 전망을 근거로 차관 제공을 할 수 없다는 뜻을 비췄다. KISA가 결국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해 건설자금에 충당하자는 돌파구를 찾아낸다. 또한 일본의 철강업계, 경제계 인사를 수 차례 만나 설득해 차관과 일본기술단의 협력을 받아낸다.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이니 실패하면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투신하자”는 우향우 정신을 강조한 박태준은 마침내 1970년 4월 1일 제철소 건설을 시작한다.
제철소 건설의 기초 자본은 일본에게 받아낸 식민지 배상금으로, 박태준 회장은 조상들의 피의 대가를 수포로 돌리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며 당시 직원들에게 사명감을 느끼도록 독려했다. 건설의 최일선에서 누구보다 가장 적극적으로 뛰었던 그는 예정보다 1개월 먼저인 1973년 6월, 제철소 일관 공정을 완수시켰다. 제1고로에 붙은 불이 밤새 활활 타올라 다음 날 아침 빛나는 오렌지색 빛깔의 쇳물을 쏟아냈으며 조업 첫해인 1973년 매출액 1억 달러, 순이익 1,200만 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는 세계 철강 역사 중 제철소 가동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이기도 했다.
포항 3기 설비 공사는 당시 국내 역사상 최대규모의 공사로 공기에 쫓기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중동특수로 숙련공들이 대거 중동으로 떠나 공사품질이 저하되는 문제가 있었다. 1977년 8월 1일 발전송풍설비 공사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 사장은 콘크리트 구조물의 기초공사 상태를 살펴보다 불량을 발견했다. 현장 책임자의 불량 원인과 대책에 대한 답변이 미덥지 못하자 박태준 회장은 망설임 없이 80%나 진척된 구조물을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다음날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폭파식을 치뤘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의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은 모두에게 강력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박태준 회장의 과감한 결단 아래 부실공사를 근절하고 3기 설비공사는 훌륭하게 완수되었다.
포항제철은 이내 국제시장의 강자로 떠오르며 해외 철강국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숱한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은 박태준 사장은 1992년 10월 연간 생산 능력 1,140만 톤 규모의 거대 제철소인 광양제철소를 종합준공 시킨다. 광양제철소는 순수 국내 기술로 지어진 철강회사로 단위제철소로는 전 세계를 통틀어 최대 규모라는 데 매우 큰 의미를 가졌다. 이를 끝으로 박태준은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 내에 8개의 고로를 건설한 포스코 창업자로서의 명예로운 역사를 마감하고, 포스코의 명예회장이자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나라를 바르게 세우는데 헌신한 박태준 회장은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1971년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를 세우고 교육보국의 첫걸음을 내딛으며 직원들이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빠르게 세워갔다. 또한, 세계적인 제철소와 경쟁하는 데 있어 기술 개발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단지 학문을 배우는 장소를 넘어, 산업의 현장과 이어진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 중심의 대학을 세우길 꿈꿨고 1986년 포항공과대학의 문을 열며 결실을 맺는다.
박태준은 멈춰 있던 세계 철강업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 인물로 평가되며 1987년 철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세머 금상’의 영예를 얻는다. 당시 수상 답사를 통해 이 상의 주인공은 포항제철의 임직원과 가족들이라며 공로를 돌렸다. 박 회장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부와 명예를 누릴 수도 있었으나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일생을 헌신한 포항제철의 주식을 단 한 주도 갖지 않았으며,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국회의원, 국무총리를 거쳐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동안 국가에 헌신하며 철 외에는 아무것도 탐하지 않은 청빈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새로운 산업이 발달하고 신소재가 계속 개발됨에도 불구하고, 철강재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기초소재로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값싸고 질 좋은 철강재를 공급하는 것은 모든 철강인이 인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무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 설비를 개선하고 기술을 혁신하는 것은 철강인의 사명입니다” 1984. 11.23. US Steel사 회장과의 대담에서
박태준은 포스코의 주인을 국민으로 여기며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국민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일평생은 국민과 국가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헌신을 기반으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길,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