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록(鶴麓) 류찬우 회장은 풍산그룹의 창업주입니다. “한가지라도 세계 최고가 되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신념으로 일평생 ‘한 우물’만을 판 대표적 기업인으로, 우리나라에 비철금속 산업을 태동시켜 오로지 이 분야에만 매진한 결과 한국을 세계 비철금속 강국으로 이끌었습니다. 방위산업 분야에서도 소총탄에서 포탄에 이르기까지 모든 탄약의 국산화를 이루어 자주국방의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방위산업의 대부’로 불리었습니다. 류찬우 회장은 ‘사업보국’, ‘전문제일’, ‘공존공영’, ‘전통문화존중’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경제발전과 국가안보,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모범적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류찬우는 1923년 5월 19일 경상북도 청송 덕천마을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선비 집안의 장손으로서 온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1937년 청송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년 후 대구공립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15살이 되던 해, 소년 류찬우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뜻을 품고 부산으로 떠났다. 일본행 여비 20원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방직에 인조견직공으로 취직하였고, 후에는 삼촌의 양조장 일을 도왔으며, 안동에서 도자기 굽는 일도 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배움을 지속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인근 학교의 강의록을 구해 밤새워 읽고 청강도 하는 등 나름대로 공부를 이어가며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마침내 그는 1957년 풍산산업이라는 작은 무역회사를 설립하였고, 1959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Tradeship社의 일본지사 무역업 경영권을 인수했다. 일본행 여비 20원을 벌기 위해 치열하게 살며 준비한 지 20년 만에 그 꿈을 이룬 것이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은 끝에 일본에 정착한 류찬우는 현지에서 무역업으로 성공을 거두며 막대한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 후 1960년대 말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자마자, 그는 일본에서 모은 전 재산 1천만 달러를 가지고 10일 만에 귀국했다. 조국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류찬우는 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결국 기초소재와 방위산업 분야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기초소재 산업의 발전 없이는 한국의 공업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명감에서 1968년 10월, 50여 명의 직원과 2천 2백만 원의 자본금으로 비철금속 제조기업인 ‘풍산금속공업’을 설립하며 그 첫 걸음을 내딛는다.
류찬우가 일본에서 고군분투 끝에 모은 자금 전액을 투자하여 비철금속 소재산업에 투신하게 된 이유는 “한 나라의 산업이 발전하려면 소재 산업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동(銅)과 동합금 소재는 모든 산업에 필수적인 요소이고, 질 좋은 소재를 저렴하게 공급받지 못하면 나라 전체의 산업발전을 이룰 수 없으므로 누군가는 꼭 해야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신동(伸銅) 사업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더라도 수익을 내기는 어려운 분야였다. 그럼에도 류찬우는 신동공장의 건설을 결심하고, 투자와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1968년 비철금속 제조기업인 ‘풍산금속공업’을 설립하였고, 이듬해 부평에 공장부지를 마련해 우리나라 최초의 신동공장을 준공하였다. 풍산금속은 1970년 정부의 5대 핵심업체로 지정되었고, 이어 한국조폐공사에 동전의 자재인 소전(素錢)을 납품하였다. 1973년에는 대만 정부의 소전 입찰에 참가하여 350만 달러의 물량을 처음으로 수출하였다. 그로부터 태국, 싱가포르, 호주, 이집트, 이스라엘 등으로 수출지역을 넓히며 세계 소전 교역량의 50~60%를 공급하면서 풍산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1980년에는 온산 신동공장을 준공하여 품질과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고, 한국을 신동산업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또한 미국 현지에도 공장을 설립하여 세계 3대 신동 기업으로 부상하였으며,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기념주화용 소전을 공급하며 세계최고 수준의 품질과 공급능력을 입증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방위산업은 기술력과 자본의 부족으로 성공 여부를 예측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으나, 류찬우 회장은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방위산업의 육성과 국산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가 탄약 국산화에 필수적인 신동 사업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1973년 그는 6.25 전쟁 당시 최후의 격전지였던 경북 월성군 안강읍에 국내 최초의 탄약전용 생산시설인 안강공장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방위산업체로 지정되어 소구경탄, 박격포탄, 곡사포탄 등 탄약의 개발을 시작했고, 1975년 필리핀에 M1소총 탄약을 수출하여 국내 최초의 방산제품 수출기업으로 기록되었다. 이어 1982년 부산 동래의 육군조병창 인수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종합탄약 생산업체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이미 1980년대 초반에 소총탄부터 대구경 포탄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군이 사용하는 모든 탄약의 국산화에 성공하여 다양한 탄약을 자체적으로 개발, 생산함으로써 국군의 전력증강에 기여하였다.
풍산은 조선시대의 명재상,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손이었던 류찬우 회장의 남다른 국가관과 애국심으로 탄생한 기업이다. 류 회장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징비록을 저술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서애 선생께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겠다는 신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방위산업의 일익을 담당하다 보니, 4백년 전 왜적을 물리치는 데 불철주야 심혈을 기울이며 국방에 여념이 없으셨던 서애 선조님의 유지를 일만 분의 일이나마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나도록 고맙고 신명에 감사할 따름이다.”라며, 조상에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겠다는 신념을 되새기곤 했다. ‘풍산’이라는 상호도 이러한 신념을 잊지 않기 위해 풍산 류씨인 그의 본관을 따라 지었으며, 방위산업에 뛰어든 것도 물론 서애 선생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류 회장을 중심으로 서애의 후손들과 학자들이 1976년 ‘서애선생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서애가 징비록에 남긴 유비무환과 자주국방의 뜻을 계승하고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활동을 펼쳤다. 1980년 사재를 출연하여 육군사관학교에 ‘서애관’이라는 체육관을 기증하였고, 1991년에는 서애 선생의 저서를 집대성한 ‘서애전서’를 간행했다. 또한 향토 기업인으로서 사재를 들여 안동 하회마을을 정비하였으며, 조선시대의 대표적 교육기관인 병산서원을 복원하고 서애 유물전시관 ‘영모각’을 건립하는 등 전통문화의 계승과 지역발전에도 공헌했다. 지금까지도 서애선생기념사업회는 류 회장의 유지를 이어받아 서애 정신의 확산과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 공헌할 구체적 사업을 구상하던 류찬우 회장은 병산서원의 전통을 이어받아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병산교육재단을 설립하였고, 그가 이사장으로 있던 재단 산하의 풍산고등학교는 사교육 없이도 학생들의 학력을 향상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93년에는 풍산의 기금 출연으로 학록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선조들의 높은 선비정신을 후학들에 길이 전하고 기업이익의 사회환원 차원에서도 장학사업은 마땅히 활기있게 이뤄져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서 비롯되었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정신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으로 실천한다는 취지에서 인재양성과 문화유산 계승을 장학재단의 목표로 삼았다. 학업성적이 우수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발굴해 지원하도록 장학제도를 확충하였고, 병산서원 향사 등 문화사업 지원을 통해 전통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사업도 펼쳤다. 지금도 병산교육재단과 학록장학재단은 설립자 류찬우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인재양성과 문화사업 발전을 위한 지원 활동을 착실히 수행해오고 있다.
류찬우 회장은 무분별한 사업 확장으로 기업이 부실해지는 것을 경계하였고, 전문화(專門化)를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좋은 품질의 첨단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믿었다. 그는 조국의 부름으로 국내 사업을 시작한 이래, 타 분야 확장에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고 신동 사업과 방위산업에만 전념하였다. 안강 종합탄약공장을 준공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신동 사업 외에 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지를 물으며 지원을 약속했지만, 류 회장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서 정중히 사절하고 기존에 갖고 있던 건설회사마저 매각했다. 1970년대 많은 기업들이 건설업에 뛰어들던 시기에도, ‘우물을 파더라도 한 우물을 파라’는 신념으로 다른 사업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나라도 세계 최고를 만드는 것이 민족기업이 해야할 역할이며 세계화로 가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 결과, 신동과 방산 부문에서 급속한 사업확장을 이루었고, 평생 ‘한 우물’을 판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류찬우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대 초에 불어닥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존폐위기 속에서도, 이를 극복해내며 기업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다. 1982년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에 취임하여 17년 동안 관련 제도와 기구를 대폭 정비하고 국내 방위산업 육성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해 방위산업계를 대표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방산특별분과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정부는 한국산업발전과 수출에 이바지한 류찬우 회장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4년, 1975년, 1981년에 각각 동탑·은탑·금탑 산업훈장을 수여했다. 1988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1999년에는 국가 기간산업 육성과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평생에 걸쳐 경제발전과 국가안보, 사회공헌 분야에서 모범적인 국민상을 펼쳐온 류찬우 회장은 1999년 11월 세상을 떠난 이후 현재까지도 ‘방위산업의 대부’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진정한 기업인은 누가 하든 국가를 위해 꼭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남이 안 하거나 못하는 일에 뛰어들어 마침내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1986년 이코노미스트紙)
류찬우 회장은 기업경영에서 ‘무엇을 위해’와 ‘어떻게’라는 명제에 대한 답으로 ‘사업보국’과 ‘전문화’를 제시했다. 모든 경영활동의 궁극적인 목표와 이를 구현하는 방법론을 통해 시종일관 이러한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 실천하였다. 우리 산업의 필수 소재이지만 외국에 의존하면 국내 산업이 예속될 위험이 있는 동(銅)과 동합금 소재의 개발, 국가의 안위에 직결되는 탄약 국산화와 공급을 통해 한국의 신동산업을 일으켜 세우고 방위산업을 이끌어 자주국방의 길을 닦는 데 일생을 바쳤다.